2008년 4월 9일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선거. 영·호남지역 제1, 제2당의 의석수는 부산·울산·경남북에서 한나라당이 46석, 통합민주당 2석, 광주·전남북은 한나라당 0석, 통합민주당 25석이었다. 양당의 공천 내분 속에 무소속 출마 당선자(영남 13석, 호남 6석), 그리고 친박연대의 대구경북 5석과 진보정당 민노당의 경남 창원과 사천 2석을 제외하고 영남은 한나라당이 석권, 호남은 민주당이 휩쓸었다. 제1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약화됐던 지역 정치구도의 재발현이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선거는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내려진 선거였다. 새로 창당된 열린우리당이 전국에서 고른 득표율로 제1당이 된 가운데, 영남 4석, 호남 25석, 충청 19석으로 지역구도에 균열이 일어났다. 우리당의 영남권 득표율은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이 얻은 13%의 배가 넘는 32%였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의원선거에 나섰던 2000년(제16대)과 1996년(제15대), 1992년(제14대) 선거는 지역대결 정치구도가 맹위를 떨쳤다. 영남 의석수는 2000년 선거에서 한나라당 64석 대 민주당 0석, 96년은 신한국 51석 대 국민회의 0석, 92년은 민자당 53석 대 민주당 0석이었다. 호남은 2000년 한나라당 0석 대 민주당 25석, 96년 신한국 1석 대 국민회의 36석, 92년은 민자당 2석 대 민주당 37석으로 영남과 반대였다.
87년 야당의 후보 단일화 실패 및 민주화세력 분열로 인한 대통령선거 패배와 88년(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3김씨(김대중-김영삼-김종필)를 맹주로 한 지역분할 정치구도는 90년 3당합당을 거치며 고착화되어 이 땅에 지역주의 정치를 재생산시켜 왔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들이 앞장서 지역감정을 선거전략으로 이용했다.
88년 부산 동구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던 노무현 대통령은 90년 3당합당으로 대구경북(TK) 정권이던 군부쿠데타 세력과 부산경남(PK)을 정치기반으로 한 김영삼 씨가 손잡은 민자당 합류를 거부한 이후 92년 국회의원 재선에 실패했고, 95년 부산시장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국민의 정부’로 정권교체 후 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제15대 국회의원이 됐으나, 1년 뒤인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부산 북강서을 선거에서 다시 고배를 마셨다. 부산에서만 세 번의 낙선, 그것은 지역대결의 정치구도가 낳은 결과였다.
“우리가 남이가!”, 지역감정 망령92년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부산 18개 선거구에서는 민자당 후보들이 모두 당선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 동구에서 ‘야도 부산 복원’을 기치로 내걸고 허삼수 후보와 재격돌했으나 낙선했다. 김영삼 씨는 88년 선거에서 허삼수 씨를 “군사반란의 주역으로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가 4년 뒤 92년에는 “충직한 군인”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낙선의 원인은 ‘노무현이를 밀어 주면 DJ(김대중)가 (차기 선거에서) 대통령이 된다. YS(김영삼)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면 미워도 허삼수를 찍어야 한다. 이번엔 후보 보고 찍는 게 아니다’ 라는 부산 사람들의 의식에 있었다. 사실 그 한 마디로 선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선거는 YS가 좌천동 증산공원에 들러 허삼수 씨의 손을 번쩍 드는 것으로 이미 끝나 버렸다”
- 1994년 펴낸 자전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부산 민심은 민자당 지지로 쏠렸다. 부산·경남(PK) 정권 창출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정치인 노무현에게 92년 낙선은 ‘지역주의’와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해 연말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호남 대 비호남’ 대결구도를 노골화했다. “우리가 남이가!”란 구호로 대구·경북과 부산·경남 유권자들의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선거 직전인 12월 15일 김기춘 전 법무장관이 부산지역 기관장들과 모임을 갖고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 씨(민주당)나 정주영 씨(국민당)가 대통령이 되면 부산경남 사람들은 모두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고 선동한 ‘초원복집’ 사건이 불거져 여론의 도마에 올랐으나, 김영삼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결과는 영남지역 유권자들의 지역주의 투표 행태로 나타났다. 김영삼 씨는 집권에 성공했다.
김영삼 정부 들어와서도 여야 정치권은 지역 대결구도를 심화시켰고, 이를 통해 정치기반을 유지해 갔다. 선거 때는 더 심화됐다. 정치인 노무현의 95년 부산시장 낙선은 ‘지역등권론’ 유탄이 한 원인이었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었고, 지방선거 여론조사에서도 상대 후보에 앞서 있었다. 하지만, 92년 대선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가 복귀한 김대중 당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 지역등권론을 내세워 전북에서 지원 유세를 시작하자 승세는 한순간 뒤집어졌다. 지역등권론이란 “어느 한 지역이 권력을 독점하거나 어느 한 지역만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논쟁이 벌어졌고, 부산 시민들은 이를 지역주의로 이해했다.
연거푸 낙선하면서도 정치인 노무현은 기득권을 쫓기보다 지역주의 정치에 맞섰다. 하지만, 벽은 높았다. 95년 민주당에서 분당해 김대중 총재가 이끈 국민회의가 창당되고, 그 이듬해 치러진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3김정치 청산’을 내건 노무현을 비롯한 민주당 정치인들은 대부분 지역주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이후 이들은 ‘개혁과 통합을 위한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꾸려 통합정치에 나섰으나 결국 한나라당(민자당 → 신한국당 후신)과 국민회의로 흩어졌다.
지역주의 역풍과 통합정치의 갈망이 땅의 지역주의의 뿌리는 ‘호남’ 소외에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영남 출신 정치군인들은 인재 등용과 자원 배분을 영남으로 몰았고, 호남을 배제시켰다. 정치군인 전두환은 80년 5·18광주민주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정권을 탈취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지형에서 핵심은 ‘지역’이 아닌 ‘민주 대 반민주’ 구도였다. 지역주의 정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87년 대선부터다. 87년 대통령선거 이후 김대중 대 김영삼, 호남 대 영남의 지역 분열구도가 심화됐다.
‘호남’이란 지역적 한계 속에 번번이 대권 도전에 실패했던 김대중 총재는 97년 대통령선거에서 충청권을 정치기반으로 한 김종필 씨와 연합(DJP 선거연합)하여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한나라당은 영남에서 지역대결을 부추겨 공격했다. “김대중 정권이 영남 차별 정책으로 부산 경제를 다 죽이고 있다”거나 “영남 사람들은 취업도 하기 어렵다”는 식의 지역감정 조장 발언들이 이어졌다. 물론, 근거 없는 정치공세였다.
여당은 지역당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동진정책을 추진했다. 당 중진이었던 노무현 부총재도 동남지역발전특위를 맡아 영-호남 지역구도 해소에 매진했다. 1998년 자신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서울 종로지역을 떠나 2000년 부산 북강서을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민주당(국민회의 후신)의 동진정책은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해소하지 못한 채 한나라당의 저항 속에 고전했다. 그런 가운데 ‘민주당’ 간판으로 나선 정치인 노무현의 부산 선거에 관심이 집중됐다. 선거 초반만 하더라도 노무현 후보의 상승세였다. 헌데 선거 중반 민주당의 ‘남북 정상회담’ 시나리오 발표가 변수로 작용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는 지긋지긋한 지역감정을 다시 들고 나왔다.
허태열 씨는 “전라도 정권 아래서 부산의 자녀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사업 수완이 있어도 틀렸다, 우리 딸들이 비굴하게 남의 눈치나 살피며 종살이를 하지 않을 것이라 누가 자신할 수 있는가”라고 지역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언론들은 “망국병 지역감정이 다시 나왔다”고 비판했으나, 선거결과는 허 후보의 당선이었다. 이번에도 부산 선거구를 한나라당 후보들이 싹쓸이했다. 지역주의에 다시 무너진 정치인 노무현은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라며 눈물을 삼켰다.
“부산의 선거에서 질 때마다 민주당은 보답이라도 하듯 나를 더 큰 정치인으로 키워주었다. 그것을 발판으로 나는 민주당의 확대 발전을 위해 다시 부산에 도전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민주당은 나에게 역풍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기이한 운명의 장난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 2002년 출간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 143쪽, 자전기록 '내가 선택한 길을 내 뜻대로 걸었다’에서
노무현 선거를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인터넷을 통해 ‘당선보다 아름다운 패배’, 지역주의에 맞선 ‘원칙 있는 정치인’이라며 관심과 격려를 보냈다. 그리고 2년 뒤, 대통령선거에서 정치개혁과 지역통합의 새 정치를 갈망한 국민들의 지지로 이어져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었다.
지역갈등 벽을 허문 대통령
“저는 지난 20년 동안 원칙을 가지고 정도(正道)를 걸어왔습니다. 정치를 하기 전에도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리고 서민과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싸웠고 마침내 이겨냈습니다. 1990년 3당합당 때 따라갔다면, 3선 4선 편안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 분열주의를 고착화시키는 분열주의적 책동이고, 국민에 대한 배신이자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는 것이었기에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4번씩 떨어지면서도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동서통합을 이루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길에 제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 2002년 2월 24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출마 기자회견
2002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도 정치권에서는 지역주의 선동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 대통령후보 호남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자 한나라당은 “노무현은 김대중 양자”라며 영남의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하지만, 정치생명을 걸고 지역주의 맞서 온 정치인 노무현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대통령선거에서 정치인 노무현이 꿈꾼 것은 전국에서 고른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 되어 지역갈등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노 대통령은 호남을 비롯한 서울, 경기, 충청, 제주에서 승리했고, 20~30대층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2002년 대통령선거 구도는 ‘새 정치와 낡은 정치’의 대결이었다.
그럼에도 2002년 선거에서도 역대 대선 때처럼 지역구도가 작동하긴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호남에서 93.2%, 이회창 후보는 영남에서 69.4%를 득표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이 영남지역에서 얻은 표(30%)는 김대중 대통령이 97년 대선 영남 득표율의 배 이상이었다.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지역주의’가 약화됐다.
이 땅의 지역주의 정치는 오랫동안 지역 간 갈등과 분열을 초래해 왔다. 지역주의 정당구도에서 정치는 정책이 아닌 지역대결로 치달았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정책경쟁이 발붙이지 못한 채 정치불신만 초래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중에 지역주의 장벽을 허물고 국민통합의 새 시대를 열어가길 바랬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지역 균형발전 정책 추진과 함께 선거제도 개편 등 정치개혁을 국회에 제안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 논의는 이전에도 있었다. 국민의 정부 때 김대중 대통령은 ‘중선거구제에 정당명부식 1인 2표제 도입’을 추진했다. 그리고 지역구 의원 대(對) 비례대표 비율을 2 : 1로 조정하자는 안을 냈다. 99년 11월, 정부여당이 이를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소선거구제 유지를 선호한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에 막혀 좌절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가진 첫 국회 국정연설에서 선거법 개정을 국회에 제안했다.
“지역구도는 반드시 해소되어야 합니다. 지역구도를 이대로 두고는 우리 정치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내년 총선(제17대)부터는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2/3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여야가 합의하셔서 선거법을 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저의 제안이 현실화되면, 저는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게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습니다.” - 2003년 4월 2일 국회(제238회 임시국회) 국정연설
국민 여론이 확산되면서 국회에서 정치개혁 입법이 논의됐다. 2003년 12월 국회는 비례대표 정수를 56석으로 늘이고 1인 2표를 도입하는 선거법을 개정했으나,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정치구조 개혁까지 미치진 못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선거 이후 정치개혁특위가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정치구조 개혁은 요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2월 25일 국회에서 가진 취임 2주년 연설에서 다시 한 번 호소했다.
“우리 정치에는 독재정치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역주의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지역대결은 감정싸움입니다. 감정싸움은 답이 없는 싸움입니다. 합리적인 정쟁과 타협의 소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싸움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분열로 이어지게 돼 있습니다. 불신과 적개심을 부추겨 편을 가르게 하고 분노와 증오로 반목하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 정치인이 발명한 득표수단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열해서 싸운 나라치고 불행에 빠지지 않은 역사가 없습니다. ···(중략)··· 지난 총선(제17대)에서 지역별 의석은 지역별 득표수를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각 당이 불리한 지역에서 받은 득표는 의석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선거구제도가 지역주의를 오히려 강화한 것입니다. 이 제도는 바로잡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2005년 8월에 나온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도 지역주의와 분열주의를 극복해 보자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선거제도 개혁을 전제조건으로 지역 정치구도를 해체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진의는 왜곡됐고, 정치권의 논란 속에 대통령 구상은 좌절됐다. 선거제도 개혁도 답보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과제
“유감스럽게도 (선거)제도는 바꾸지 못했고 지금 제도는 다시 후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역주의는 어느 지역 국민에게도 이롭지 않습니다. 오로지 일부 정치인들에게만 이로울 뿐입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않고는 정책과 논리로 경쟁하는 정치, 대화와 타협으로 국민의 뜻을 모아가는 정치, 정치인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 그런 아름답고 수준 높은 정치를 우리는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 2007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연설
재임 중 노무현 대통령이 고민했던 지역주의 극복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 동안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현실정치에서 지역주의는 온존해 있다. 정당들은 ‘정책’보다 여전히 ‘지역’에 기대어 정치를 하려 한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기형적인 정당정치와 지역 대결정치로는 민주주의의 진보와 사회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2012년 4월 11일 국회의원선거가 다시 그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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