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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1988년 노무현의 첫 선거를 말하다②
회식 한번 하자는 말에 노 후보 ‘버럭’

'인권변호사 노무현' 만났던 노동자·학생들 '후보 노무현' 돕다

 

다음은 노무현 대통령과 부산상고 동기동창인 원창희 씨가 회고하는 1988년 첫 선거 당시 동문들의 선거운동이다.

[원창희 구술영상]

노무현 후보의 선거운동이 학연이나 지연에 기댄 것만은 아니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시기에 ‘노변’을 처음 만나 1984년 공해문제연구소 간사로도 활동했던 최병철 씨는 선거운동의 한 장면을 이렇게 기억한다.

[최병철 구술영상]
 



최병철 씨의 말처럼 외곽에서 혹은 지구당 조직 밖에서 움직인 사람들. 이와 관련해서 대통령을 여전히 ‘노’라고 칭하는 동구지구당 이석렬 사무국장은 “노동자들 집회할 때 ‘노’가 많이 지원하고 변호를 해주고 이러니까 많이 와서 도와주고, 또 대학생들도 자원봉사 많이 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노 후보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연을 맺은 노동자들의 참여는 선거운동의 또 다른 주요 축이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선거 부산 동구 합동유세. 노무현 후보(가운데)가 유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아래 사진은 선거 벽보.


노조에서, 학생들이, 민가협 어머니들이…
이재영 씨는 ‘학출’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1985년 당시 ‘노변’을 만난 이후 줄곧 현장에서 노 후보의 재야운동, 노동변론 활동 등을 매개한 ‘파트너’였다. 노 후보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부산국본) 노동문제대책특위 간사를 맡기도 했다. 둘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전후 노조 설립 지원, 그 과정에서 벌어진 부당해고 등 각종 소송을 도맡으며 현장 활동을 함께 해왔다. 이재영 씨는 그런 노동자들과 노 후보의 선거운동을 조직했다.

[이재영 구술영상]



노무현의 첫 선거에는 부산지역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자원봉사자로 뛰었다.
노 후보가 부림 등 시국·노동사건 변론을 맡았던 관계자들의 어머니들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원이 되어 김치를 담아다가 이렇게 ‘밤에도 뛰고 낮에도 뛰는’ 사람들의 밥을 챙겨줬다. 지구당 사무실 정리도 하고 직접 동네로 나가 홍보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노 후보가 이재영 씨 등과 함께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했던 택시기사들도 선거운동을 도왔다. 각 동 책임자들이 일정에 따라 해당 장소로 나갈 때면 이들 택시기사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가 속속 사람들을 데려다줬다. 비번인 날에는 종일 이동차량이 되어 줬다. 모금활동도 지원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노 후보의 노동운동 지원, 인권변호사 활동이 선거운동의 든든한 뿌리가 된 셈이었다. 이들의 지원과 참여는 특별한 대가나 보상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당선이 확정되자 이들 ‘비공식 조직’은 조용히 해산했다. 이재영 씨의 이어지는 말이다.

[이재영 구술영상]

관련해서 <동아일보> 1988년 4월 27일자 총선 개표 스케치 기사에는 ‘대학생 전경 밤새 대치’ 소식이 실려 있다. 내용은 이렇다.

부산고 체육관 내에 마련된 부산 동구 개표소에는 체육관 옆 불과 20여m 떨어진 운동장에 부산지역 대학생 4백여 명이 전경대원들과 밤새 대치하기도. 동구 개표소에는 26일 오후 6시부터 자칭 ‘민정당 일당독재 저지를 위한 단결본부’ 소속 학생들이 몰려와 개표소인 부산고 교문 앞에서 각종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전경들과 대치하다 노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이날 오전 해산.

 
선거결과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었다. 노 후보가 개표 다음날인 88년 4월 27일 트럭에 올라 부산 동구 시내를 돌며 지역민들에게 당선사례를 하고 있다.


1988년 총선 관련 구술에는 돈에 관한 노 후보의 ‘고지식함’을 보여주는 일화도 나온다. 먼저, 자서전 <운명이다>의 한 대목이다.

자금 지원도 넉넉하지는 않았다. 선거 막바지에 중앙당의 지원금이 왔으나 워낙 돈 안 쓰는 선거운동을 했기 때문에 막판에 쓸 일도 없어서 돈이 남았다.(100p)
 
회식 한번 하자는 말에 노 후보 ‘버럭’
‘워낙 돈 안 쓰는 선거운동’이 어느 정도였을까. 동구 지구당 김영자 여성부장은 회식 얘기를 꺼냈다가 노 후보가 버럭 화를 냈던 일을 소개했다.

[김영자 구술영상]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어떻게 썼을까. <운명이다>에는 이렇게 기록돼있다.

어려운 형편에도 적지 않은 돈을 모아주었던 부산상고 동문들이 알았다면 화를 냈겠지만, 울산과 마산 등지에서 재벌 후보와 맞붙은 노동자 후보들이 돈이 없어서 만들어 놓은 홍보물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하기에 돈을 나누어 주었다. 선거 뒷정리가 끝난 뒤에 남은 돈은 부산 청년단체가 사무실을 얻는다고 해서 다 줬다.(100p)

최병철 씨의 관련 증언이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 시절 대변인을 하던 분이 지금은 돌아가신 임정남 시인이었습니다. 강은교 시인 남편 되시는 분인데 대통령님보다 한 살 위셨어요. 이분이 어느 날 ‘노 변호사가 선거 끝나고 나서 돈 이천만원 정도 주더라’고 해요. ‘남을 돈이 어디 있는데요?’ 그러니까 ‘하여튼 남았대’ 하면서 ‘그 돈 갖고 우리보고 사무실 다 옮기란다.’ 그래서 범내골에 있던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 사무실을 정리하고 중앙동에 동호빌딩이라고 있습니다. 거기 두 층을 얻어서 한 층을 강당으로 쓰고 한 층에 부민협, 민가협 등등이 들어와 2~3년간 있었죠.

동구지구당 사람들과 노동자를 비롯한 ‘공식·비공식’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를 통해 돈 안 쓰는 선거를 하고, 남은 돈으로 노동자 후보와 부산의 시민사회단체를 지원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첫 선거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민주정의당 허삼수 후보 4만 3,986표.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 5만 3,075표.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 결과 부산 동구는 노무현이라는 초선의원을 선택했다. 원내 진입한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 기간은 물론, 16대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첫 선거를 함께 치른 사람들의 인연은 계속됐다.

첫 선거 이후에도 계속 노무현과 함께 가다
김규도 수석부위원장, 이석렬 사무국장, 여성부 김영자, 성숙희, 김순복 씨 등 동구지구당 사람들은 초선의원 노무현과 같이 1990년 3당합당을 거부하고 민주당 당원으로 남았다. 그리고 서울 종로로 원정까지 가며 선거 때마다 대통령을 도왔다. 최병철 씨도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의 국민참여운동본부에서 일했다. 이재영 씨는 초선의원 시절 비서 등을 거쳐 국민참여운동본부, 인수위 사회분과 등에서 활동했다. 이들에게 1988년 총선은, 자신들이 지원했던 노무현 후보는 어떤 의미였을까. 동구 지구당 여성부 구술자 가운데 막내인 김순복 씨는 자신이 간직한 의미의 일단을 이렇게 얘기했다.

[여성부 김순복 구술영상]


 

  • 김상철/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03.21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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