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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1988; 노무현 ①
노 후보 Life Story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거친 질감의 갱지 위 타자기 글씨, 그 위에 급조하여 쓴 듯한 ‘노 후보 Life Story’‘라는 제목.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오타와 수정의 흔적 그리고 통일되지 않은 서식까지, 어느 모로 보나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은 글이라는 점이 어렵지 않게 짐작됐다. 30여 년 동안 누군가의 손길도 눈길도 거쳐 가지 않았던 이 낡고 바랜 문서는 1988년 노무현이 남긴 생애 첫 자전적 에세이의 초고였다.

최초로 공개되는 이 사료에는 작은 글씨로 적어 놓은 메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직접 구술하고 당시 변호사 사무실 직원이 타이핑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 그렇게 메모의 흔적을 따라 찾아간 ‘사무실 직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랜 세월 사료가 머금고 꺼내놓지 않았던 노무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민주화, 결코 끝나지 않은

처음으로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한 노무현의 고민과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노 후보 Life Story>는 퇴고와 편집을 거쳐 1988년 선거운동 홍보 팸플릿에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여보, 나 좀 도와줘』(1994), 『운명이다』(2010) 등의 자서전에서도 원고의 내용이 인용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사용했던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노래 가사도 이 원고에서 처음으로 언급됐다.



글이 작성되었던 무렵은 노무현 변호사가 고민을 깊이 해가던 시기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젠 변호사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다.’며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는 다시 거리로 발길을 돌렸다. 야권의 분열로 인한 노태우의 집권 가능성이 한 가지 이유였고, 대다수 정치권과 중산층에게 더는 절실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서민과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궁핍함이 또 다른 이유였다.

그해 9월 노무현 변호사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사건과 관련해 법적 지원을 하던 과정에서 ‘3자 개입’, ‘장례식 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에 처해진다. 구속적부심으로 23일 만에 석방되었지만,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치 처분을 받았고 12월 13일 대통령 선거에서는 양 김(김대중·김영삼)으로 대표되는 야권의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며 좌절감을 느꼈다. 채 가시지 않은 민주화의 잔열에도 변호사 노무현과 거리에 남은 이들에게만은 유독 소슬했던 1987년 겨울이었다.

계속되는 번민 속 새해가 밝았고, 그동안 거듭해 온 고민들은 노무현의 새로운 결심으로 이어졌다. 1988년 봄, <노 후보 Life Story>라 제목 붙인 정계진출 출사표 위에 그 고민들이 고스란히 옮겨갔다.


40대의 노무현이 돌아본 삶의 자취

“우리또래 나이의 사람들 모두가 그랬듯이 나의 어린시절도 무척이나 가난했다....  그중에서도 고3시절 늦은가을 어느날 잘곳이 없어 학교 교실에서 이틀을 잤는데 밤새껏 이를 악물고 얼마나 떨었던지 이튿날 온종일 이가 아파 밥도 못먹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40대 초반의 노무현은 곤궁함에 넌더리났던 어린 시절을 무덤덤한, 그러나 가난의 절박함을 담뿍 함축한 몇 마디로 간추리며 글을 시작한다. 누나로부터 물려받은 헌 필통을 친구의 새 필통과 바꿔치기하려다 망신당한 일, 돈이 없어 준비물을 사지 못해 번번이 꾸중 들었던 일, 한 푼이라도 싼 거처를 찾아 전전했던 일 등.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된 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외면하게 된 스스로에 대한 씁쓸한 자조가 뒤따른다. 그리고 이야기는 ‘부림사건’을 겪으며 “겉으로는 번지르르 하고 화려한 사회의 이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희생과 고통”에 눈을 뜨게 되고 다시 어린 날의 다짐이 되살아나는 과정으로 이어지며 진중함을 고조시킨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빠지게 일을 해도 겨우 일[입]에 풀칠하기가 고작이고 자식 대학공부도 조그마한 자기집 한 채의 꿈도 가져 볼수 없는 천대꾸러기들. 그에 비하여 대낮에도 골프장에 나가서 한판에 200만원짜리 내기골프를 즐기고 그것도 힘들었다고 사우나탕에 가서 몸풀고 저녁에도 수백만원어치씩 술을 마시면서 여자나 끼고 희희낙락하고 놀아도 가는곳마다 대우받고 하루에 이자수익만 5,000만원이 넘는사람. 어떤 사람은 돈2,000만원만 훔쳐도 당장 구속이 되고 어떤 사람은 수백억을 해먹고도 외국이나 들락날락 하면서 그들먹거리고 사는 세상. 이것이 어찌 사람사는 세상인가.”

민주화운동에 뛰어들며 어찌할 도리 없이 마주해야 했던 생계와 현실의 고민들, 6월 항쟁 이후에도 노동권과 인권의 회복을 위해 거리에 남은 사람들, ‘노동자 대투쟁’ 대열에 합류하면서 겪게 된 구속과 업무정지, 그리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까지, 이러한 여정의 나래를 하나하나 적어간 끝에 노무현은 묻는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과도 타협되지 않은 생각의 씨앗



대부분 ‘초고’는 여러 이유로 관심을 끌게 된다. 공식적으로 출판된 글보다 날 것 그대로이기에 느껴지는 순수함이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출판사든 조언자든 세간의 시선이든 무엇과도 타협되지 않은 생각의 씨앗이다. 시간이 흐르며 보정되고 보완되는 기억의 원형이다.

<노 후보 Life Story>에는 성기게 엮인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로 거칠고 투박한 표현들이 툭툭 던져지고 있다. 경어체와 평서형 문장이, 문어체와 구어체 문장이 뒤엉켜있다. 이처럼 조심성 없이 써내려간 이야기 타래는 되레 그의 생각을 더 투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고생과 서름[설움]속에서 자라면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출세를 해서 고생도 벗고 서름도 갚고 고생하는 사람도 도와주리라 거듭 다짐했다.”
“나는 시민의 대열속에 파묻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동안 악독한 독재자들의 손에 죽어갔던 많은 사람들. 가까이는 박종철군을 생각하면서....”
“이 같은 불공평이 단지 사람이 잘나고 못나서 그런것이 아니라 돈많은 사람과 권력을 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빨아먹기 위하여 한통속이 되어 법과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때문에 생긴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나 혼자 하는 무료변론 몇건이 아무소용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점차 힘이 빠졌읍니다.”



그해 4월 정식으로 출판 된 ‘내가 걸어온 길’에 비해 초고는 정제되지 않은 표현과 지나칠 정도의 솔직함으로 스스로의 부끄러운 면모와 세속적 욕망까지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초선 후보·변호사·인권운동가·재야의 신성 등 모든 수식어를 제거한 ‘인간’ 노무현을 오롯이 드러내는 듯하다.


“양심의 갈등이 없는것은 아니었으나 우선 가까운 형제조카들을 돌보아야 하고 장차 노후를 위하여 부동산도 좀 사놓고 시골에 농장이나 별장도 하나쯤 가지고 싶은데 가난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그일 다보아 주다가는 내 화려한 꿈이 몽땅 깨질판이라 나는 눈 딱 감고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변호사는 왜 돈있는 사람편만 드느냐고 물을라 치면 세상에 있는것 치고 돈있는 사람 편리하게 안되어 있는것이 무엇 있드냐고 밀어부치고 이웃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며 살았다.”


한 사람의 아버지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초선에 도전하며 내던진 노무현의 출사표에는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수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으레 정치인이라면 무용담처럼 내세우는, ‘정치적 인간(homo politicus)’으로 거듭나는 ‘각성’의 순간도 없었다. 스위치 하나로 꺼지고 켜지는 불빛과 같은 극적인 마음의 선회 같은 것은 없었다.



‘부림사건’을 통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린 날의 다짐을 상기했다지만, 그럼에도 이상과 현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수 년 간 괴로워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마음을 돌린 것은 장대한 하나의 사건이 아닌, 평범한 일상과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몸과 마음으로 익혀온 그의 삶 전반이었다. 그리고 노 후보는 그 여정에 함께했던 한 청년을 각별하게 돌아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 어디로 끌려가 병신이 될지, 언제 무슨 죄목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끌려갈지 모르는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일뿐 아니라 조그만 농장이나 별장을 갖고 싶다던 염치없는 꿈도 자식만은 외국까지 유학을 보내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우리 부부의 한을 풀어보겠다는 희망도 모두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82년부터 나는 하루하루 양심과 욕심 (사이에) 갈등을 겪으면서 살았다.... 그때 출소한 청년 한사람을 내가 하는 변호사 사무실에 채용했는데 정말 마음곱고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게 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옛날에 고문당한 골병이 남아 날이 굿은 날이면 신경통으로 결근을 하기도 하였고 그러면서도 자기혼자 월급받고 편하게 산다 싶은지 고민을 하는 것을 보면서 결심을 굳히고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당시 나는 그의 고통을 볼때마다 국민학교 다니는 어린 자식놈의 얼굴이 그의 얼굴에 겹쳐졌다. 이놈이 장차 대학에 갔을 때 나는 무엇이라 가르칠 것인가. 이 청년이 가는길을 걸으라고 할것인가, 아니면 모두 못본척 하고 높은자리에 편안히 앉아 돈이나 벌어 잘 살라고 할것인가. 양심이니 정의니 하기 쉽지만 차마 내사랑하는 자식에게 어찌 이 청년과 같은 고통을 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던 끝에 지금 우리 애비들이 나서서 자식들이 할 고생을 대신하여 그들에게는 어두운 세상도 그에따른 고통도 물려주지 않도록 해보자고 결심하였다.“


한 점의 사료가 건네 온 이야기



1988년 초, 부산 남천동의 한 아파트에 모여든 밤손님들. 주택가의 불빛이 점점 드물어지는 시간. 꽤나 진지한 한 남자의 목소리와 타자기 소리가 적막한 새벽 공기 속에 흩뜨러졌다. 그렇게 ‘노 후보 Life Story’가 광안리 해안가 말갛게 트는 먼 동 따라 고개를 들었다.


노 후보 옆에는 채 영글지 않은 손으로 타자기 위에 옮겨 담는 그의 말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라 세상에 대한 고민을 더해가던 한 사람이 있었다. 노 후보가 결심을 굳히도록 했다는 ‘청년’ 송병곤(부림사건 피해자) 씨와 훗날 부부가 될 사무실 직원이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동구 선거 사무실까지 노무현 변호사의 일상을 지켜봐 왔던 임영미 씨가 원고에는 채 담지 못한 나머지 ‘노 후보 Life Story’를 들려주었다. ■



-<1988; 노무현> 2편에서 계속-



<노후보 life story>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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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성민 / 사료콘텐츠팀
  • 2021.01.25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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