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6일, 대통령에 취임한지 3개월쯤 되었을 무렵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합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북한의 핵개발 소식이 다시 들려오고, 일본에서는 총리의 거듭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자위대가 군사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유사법제 3법’의 국회 통과로 우경화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습니다.
나흘간 이뤄진 노무현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은 한일관계와 북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일본 천황을 비롯한 정·재계 인사를 만나는 일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현충일에 일본을 방문한다는 일부 언론의 비판이 있었지만, 북핵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당시 반드시 필요한 과제였습니다.
일정 3일차인 6월 8일,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TBS의 프로그램 ‘한국의 대통령-솔직하게 직접 대화’에 출연합니다. 한국 대통령으로선 이례적으로 일본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시간을 마련한 것인데요. 방송은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의 청소년, 대학생, 주부, 직장인, 재일교포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방청객들과 자유롭게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이날 대화는 일본의 언론인 故 지쿠시 데쓰야, 1세대 앵커우먼 다마루 미스즈, 한국에서 ‘초난강’이란 예명으로 활동했던 쿠사나기 츠요시 씨가 진행했습니다. 사회자들은 한국과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들을 소개했는데요. ‘북한은 위험하다’는 질문에 한국 국민은 62%가, 일본 국민은 90% 이상이 위험하다고 답했다는 결과를 언급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북한 문제에 대한 일본 시민들의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북한과 한국은 독립된 국가로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장래 한반도의 비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저는 북한은 그것이 국가로서 법적 자격을 가지고 있다 없다 논쟁하기 이전에 북한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가적 실체입니다. 대화하고 상대로 인정하고 그들과 거래하고 약속하고 또 설득하고 이런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함께 평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너가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법적 자격이 뭐냐 이런 얘기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저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대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북한과는 대화를 통해서 장차 핵무기를 포기하게 하고, 서로 교류 협력을 통해서 그렇게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이웃이 되고 어느 땐가 통일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통일은 천천히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평화가 확고히 굳어지고 그 위에서 서로 공동의 번영을 이루어나가면 정치적 통일은 천천히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냉정하게 하나하나 분석해보면 북한은 한국보다도 힘이 약하고, 일본보다는 훨씬 약합니다”며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 자체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과는 대화를 통해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 이끌고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밝혔습니다.
방송은 도쿄 외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일본 국민들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오사카에 위치한 방청석에서는 ‘앞으로 우호관계를 심화시키고 싶은 3개 국가’를 꼽아달라는 질문이 전달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을 첫번째로 꼽으며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한 경험이 가장 많은 나라이기 때문”이라 답했습니다.
한일관계가 주제로 올라오며 과거사 문제에 관한 양국 국민의 여론조사가 소개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일본 국민은 64%가, 한국 국민은 90%가 여전히 청산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방일 기간 과거사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관해 말을 아껴왔는데요. 방송국 팩스를 통해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인 생각과 대통령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들려주십시오”
“제가 취임식을 앞두고 고이즈미 총리를 초청하려고 했는데 그때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 참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초청을 취소할 것이냐 안할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그때 초청을 취소해버리면 한일관계는 다시 얼어붙어 버립니다. 그당시 우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손발을 맞추어 나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데, 그 문제로 초청을 취소해버리고 해서 양국간 지도자 사이에 감정이 생겼을 때 이후의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이런 것이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와서 북핵 문제에 관해서 긴밀히 협의해야 하고 거기에 서로 의기투합해야 하고, 신뢰해야 하는데 과거 얘기를 자꾸 들먹거리면 그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과거 문제를 다 묻어버리자.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략) 문제는 말로 해서 끊임없는 시비거리로 삼을 것이 아니라 과거사를 극복할 수 있는 공동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저는 다 묻어두자는 뜻은 아니지만. 모든 문제를 다 후벼 파서 감정적 대립 관계로 끌고 가는 것이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명한 방법으로 풀어가자는 것입니다. 과거사에 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만. 답변은 제 가슴 속에 묻어두겠습니다.”
"서로 반목하고 불신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북한, 과거사 문제 외에도 일본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궁금했던 여러 가지 질문들이 오갔습니다. 자녀의 교육 방침, 존경하는 인물과 같은 개인적인 질문부터 재일교포의 역할, 일본 문화개방 등 평소에 접하기 힘든 신선한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의 한 초등학생이 보내온 질문이 소개되었습니다.
“저는 반장을 1학년 때부터 쭉 해왔습니다. 대통령은 한국 국민들을 어떻게 이끌고 싶으신가요?”
“제가 정치를 하면서 항상 부대껴왔던 문제는 서로 편을 갈라서 불신하고 적대하고 서로 비난하고 그렇게 해 왔습니다. 서로 토론해서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닌데, 합리적으로 토론해서 결론을 낼 수 없는 그런 감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서로 반목해서 하는 일마다 자꾸 싸움만 되는 것이 저는 큰 걱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동안에 이웃 나라 간에 서로 싸우고 그 감정이 남아서 지금까지 다 풀어내지 못하는데, 또 우리는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또 정치적으로 동서가 갈라져 지역 간 대결을 하기 때문에 서로 반목하고 불신하지 않는 사회 서로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보고 싶고 국민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날 방송은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대통령은 일본 국민들의 질문에 명료하게 답해줬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대통령이 퇴장한 후 사회자들의 간단한 평이 있었습니다. 故 데쓰야 씨는 “말은 부드럽지만 생각이 매우 일관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칙을 중요시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북한에 대해서는 철저한 평화주의자”라고 평했습니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인데요. 일본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사상과 철학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