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편드는 국회의원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원 신분이 되면 노동자 지원 쉬어질 것으로 생각”노무현 정치의 시작은 ‘노동’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입문의 동기는 ‘노동자의 대변인’이었다. “국회에 노동자를 편드는 국회의원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는 것, 그것이 노무현 정치의 시작이었다.
“처음 정치를 시작할 당시 우리 사회의 민주화라는 일반적인 인식이나 의지도 있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신분을 취득하려던 목적도 있었다. 변호사로서 변론 활동을 통해서 지원을 하다가 그것을 못하게 되었는데 국회의원 신분이 되면 그게 좀 쉬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책 성공과 좌절 中)
부림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가 된 노무현 변호사의 활동의 중심은 민주화와 노동이었다. 84년 9월 부산 변호사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만들면서 노동 관련 변론을 적극적으로 맡았다. 이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은 노동자들의 사랑방이 됐다.
33번 수인복을 입은 노무현 변호사(1988.04.10.)
87년 8월 22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변호사는 이때 거제로 달려가 사인규명, 보상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이 일로 ‘제3자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돼 부산구치소에 수감됐다. 23일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 났지만 변호사 자격은 정지됐다.
국회의원 배지는 유용한 무기
국회의원 배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이때부터였다. 어느 국회의원이 면회를 하러 찾아왔고 변호사가 아닌데 면회가 가능한 것을 경험한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세로서의 국회의원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돕고 지원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 투쟁의 수단으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초선 노무현 국회의원의 첫 대정부질문(1988.07.08.)
“노동자들이 탄압을 받고 있는 곳에 가서 조사를 하거나 그 사람들을 만나는 일, 또는 구속된 사람을 찾아가 접견을 하는 일 등입니다. 접견이라는 게 사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위안이 되고 힘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고 싶었던 것이 국회에 진출하게 된 큰 동기였습니다 ” (책 성공과 좌절 中)
오랜 기간 노동자들을 돕고 지원하는 활동을 하면서 노무현은 변호사로의 한계, 법전만으로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정치가 가진 더 많은 가능성이 노동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인식, 그것이 노무현을 정치로 이끌었다.
그렇게 국회의원이 된 초선 노무현 의원의 의정 활동은 ‘노동 현장’이었다 초심 그대로였다. 몸은 의원이었지만 현장에서 외치는 일은 체질이었다. 노대통령은 “노사가 충돌하면서 생겨난 노동 현장에 가서 조사하고 그것을 국회에서 따지고 하는 일 들이 국회 활동의 전부였다”고 회고했다. 특히 노동 현장 강연이 많았다.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지 가족의 이사 날짜를 챙기지 못해서 지방 강연을 갔다가 부산 집에 갔더니 그날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한 날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초선의원 노무현이 선택한 국회상임위원회는 당연히 노동위원회였다. 원진레이온(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죽어간 사건)이나 문송면 소년 사망사건(15세 소년 문군이 입사 후 두 달 만에 수은 중독으로 숨진 사건)같은 노동문제에 집중했다.
5공 청문회의 중심인물로 청문회 스타가 됐을 때도 노무현 의원의 관심은 노동이었다.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청문회를 하면서도 계속 노동 현장에 다녔다.
국회의원이 한 쪽 편만 든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때 노무현 의원의 대답은 "국회에 299명 의원이 있는데 200명 이상이 사장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까? 압도적으로 많은 의원들이 사장 편에 있는데 노동자 편도 몇 명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였다(책 성공과 좌절 中). 노무현에게 정치는 약자 편에 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힘없는 노동자 대신 너희 자식들을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여라”
88년 7월 8일 국회의원로서 첫 대정부 질의는 노무현 의원이 노동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심과 열정을 갖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송면군의 수은 중독 사망사건 △열네살 어린 소년이 하루 11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자기가 다니던 공장에 불을 지른 사건 △현대엔진 노동쟁의 구사대 개입 △노동조합 파업의 자유에 대한 부정 등 당시 거의 모든 노동사안에 대해 깊이있는 질문과 대책을 제시했다.
특히 대림산업 이란 정유소에서 노동자들이 참사를(이라크 공군기 폭격으로 13명 사망, 안전조치 미흡 등 사회적 논란) 당한 것과 관련해 관련해 경제발전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발상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니네들 자식들 데려다가 죽여라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을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이야”
그렇게 노사가 충돌하는 현장을 발로 뛰며 중재와 해결을 위해 노력했던 노무현 의원은 돌연 국회의원이 된지 10개월만인 89년 3월 19일 의원직 사임서를 제출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정치를 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절망이 그를 멈추게 했다. 그 절망의 뿌리에는 노동 현장의 절박함이 있었다. 그가 당시 김재순 국회의장에게 보낸 자필 사임서 8장의 대부분은 노동문제였다.
“노동상임위원회의 활동도 소용이 없습니다. 위원회 회의 또는 국정감사 활동을 통하여 노동자에 대한 위법 부당한 행정 처리와 공권력 발동을 무수히 지적하고 그 시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쳐진 것은 단 한가지도 없고, 오늘도 같은 위법 부당한 행정이 반복되고 있습니다”고 무력감을 털어 놓았다.
이에 앞서 88년 12월 26일 울산현대중공업 대운동장에서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도 노동자 대변을 위해 국회의원이 되려 했던 목표와 현실 사이에서 힘들어 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저는 국회에 가서 저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지만,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한 번 해보려고 하면 여기서 견제가 들어오고, 저기서 로비가 들어오고, 그래도 눈 딱 감고 밀어 붙여 보면 쪽수로 깔아 뭉개버리니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노동자대표가 국회에 들어가야 합니다. 노동자 대표 몇 사람만 더 있어도 어깨에 힘이 좀 생기겠고요, 20명만 있으면 화끈하게 한 번 해보겠는데..., 노동자 대표 20명만 국회에 보내 주시면 국회를 한번 쥐고 흔들어 보겠는데 정말 답답합니다”
노동자 대표하는 의원 몇 사람만 더 있어도 힘이 생기겠는데
노동은 노무현의 삶이었다. 그가 살았던 당시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을 몸서리치게 경험한 청년이었고 노동자였다. 울산 공단 조성 현장 합숙소에서 막노동을 하다 발이 못에 찔리고, 큰 목재가 얼굴을 때려 부상을 입고 일을 못하게 된 적도 있다. 일당 180원에 세끼 밥값 105원으로 돈을 모을 수도 없었다. 밥값이 2,000원 이상 밀려 몰래 도망쳐야 했던 고단했던 삶, 전쟁같은 노동을 경험했다. 그런 삶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노동자를 돕는 인권 변호사로, 노동자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이라는 소명으로 이어졌다.
대통령이 된 후 노무현대통령은 노사문제로 노동계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몇 몇 사안에 대해서는 대립하기도 했다. 노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노동계로부터 배신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언제나 외로웠던 노무현은 그가 평생을 바쳐 도우려 했던 노동에서도 아프고 쓸쓸했다.
2005년 6월 24일 근로자의 날 정부포상자 등 노사협력 유공자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제가 옛날에 노동자들을 좀 도와줬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지금은 안도와주고 해서 이제 노동단체로부터 타도대상이 되기도 한다”면서 “그러나 제 생각은 또한 변하지 않는 일면이 있다. 우리가 합리적인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켜나가는 것, 그런 가운데 센 쪽은 좀 억제하고 약한 쪽을 돕는 것, 그런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제 원칙”이라고 말했다.
노무현대통령의 노동정책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노동은 노무현 정치의 출발이었다. 정치를 하게 된 절박한 이유였다.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 들을 쉽게 면회하고 더 많이 도울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가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2026년 5월 1일 노동절, 여전히 노동은 아프고 힘들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시대, 노동의 손을 잡고,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던 노무현의 마음을 다시 떠올린다. "노동자 대표 몇 사람만 더 있어도 어깨에 힘이 좀 생기겠다던, 20명만 되면 화끈하게 한 번 해보겠다던 노무현의 호소는 지금도 유효하다.
[친필]노무현 국회의원직 사임서
정구철(노무현재단 편집위원)

